영혼의 창 (Windows of the Soul)
(Ken Gire, 윤종석 역, 꽃삽, 2007)
캔 가이어 ( Ken Gire )의 <영혼의 창>을 읽고
요즈음 읽은 책 중에 켄 가이어 (Ken Gire )의 <영혼의 창 >이 있어요. 내 영혼에 이분의 글이 또 한 번 산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리는 <내 마음의 풍경>을 떠오르게 했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인생 초기에 그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 씨를 뿌리고’ 싶어했다.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밤마다 책상에 앉아 성경을 영어, 독어, 불어로 번역하여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옮겨 적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매일 읽었다. 하지만 말씀을 외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삶을 보고 싶었다.">
고흐에 대한 이야기오.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신학교육도 받았소. 특유의 기질과 열정과 괴벽으로 기성 종교에 다가갈 수는 없지만 가난한 탄광촌의 <평신도 전도사>의 길을 걸으며 광부들 속에서 똑같이 가난하게 살았소.
그리고 그들의 칠흑 같은 삶 속에 빛과 희망과 격려를 주려고 애썼소.
그는 동생 태오에게 "언젠가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삶을 사람들 눈 앞에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화가 반 고흐의 삶의 시발점이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하였소. 그리고 마침내 말을 멈추고 그림만 그리게 되었소. 그는 가난하고 짓밟힌 이들에게 마음이 끌려 바느질하는 시골 아낙들, 토담 밑에서 일하는 여자들, 긴긴 노동 끝에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 농부, 광부들, 우는 여자, 기도하는 여자, 무릎에 아이를 안은 여자 등을 그렸소. 그는 감상적 우울이 아니라 숙연한 슬픔을 깊고 부드럽게 나타내려고 하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가이어는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색채의 언어와 구성의 문법이 내게는 생소하기만 하였다. 이 암호 같은 몸짓 언어를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 하였소. 그는 시인 릴케의 도움을 얻고자 릴케의 편자들을 읽었소. 그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림 보는 법을 배웠소.
빈쎈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그린 그림의 목적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 음악이 위안이 되듯 나는 그림으로 뭔가 위안을 전하고 싶다. 나는 남녀 인간을 그리되, 흔히 머리 위의 후광으로 상징되던 영원한 그 무엇을 담아 그리고 싶다." 그의 스케치 <영원의 문>은 한 남자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에서 나는 하나님과 영원의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를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왜소한 한 노인의 표정 속에 담겨 있다. 구석진 불가에 말없이 앉아있는 노인은 자신의 그런 표정조차 모를지 모르지만 그처럼 무한한 감동이 있을까. 또한 거기에는 뭔가 소중한 것, 뭔가 고귀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감동한 고흐가 말하려는 정신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소. 그래서 1970 년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가수로서 37 위 ( 100 중 )에 있었던 전설적인 미국 가수이면서 작곡가, 작사였던 돈 맥클
린의 <>에서 후렴에
"이제야 나는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애써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그리고
당신의 온전한 정신을 갈구하며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사람들은 듣지 않으려고 했고 알지도 못했어요.
아마도 , 지금은 사람들은 들으려 할 거에요."
그리고 마지막 그는 다시 반복하여
" 이제야 나는 알겠어요.
당신이~
~
~
~
아마도 사람들은 영원히 듣지 않을 거에요 " 라며 돈 맥클린은 이렇게 노래 부르고 있소.
그리고 그들의 칠흑 같은 삶 속에 빛과 희망과 격려를 주려고 애썼소.
그는 동생 태오에게 "언젠가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삶을 사람들 눈 앞에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화가 반 고흐의 삶의 시발점이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하였소. 그리고 마침내 말을 멈추고 그림만 그리게 되었소. 그는 가난하고 짓밟힌 이들에게 마음이 끌려 바느질하는 시골 아낙들, 토담 밑에서 일하는 여자들, 긴긴 노동 끝에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 농부, 광부들, 우는 여자, 기도하는 여자, 무릎에 아이를 안은 여자 등을 그렸소. 그는 감상적 우울이 아니라 숙연한 슬픔을 깊고 부드럽게 나타내려고 하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가이어는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색채의 언어와 구성의 문법이 내게는 생소하기만 하였다. 이 암호 같은 몸짓 언어를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 하였소. 그는 시인 릴케의 도움을 얻고자 릴케의 편자들을 읽었소. 그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림 보는 법을 배웠소.
빈쎈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그린 그림의 목적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 음악이 위안이 되듯 나는 그림으로 뭔가 위안을 전하고 싶다. 나는 남녀 인간을 그리되, 흔히 머리 위의 후광으로 상징되던 영원한 그 무엇을 담아 그리고 싶다." 그의 스케치 <영원의 문>은 한 남자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에서 나는 하나님과 영원의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를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왜소한 한 노인의 표정 속에 담겨 있다. 구석진 불가에 말없이 앉아있는 노인은 자신의 그런 표정조차 모를지 모르지만 그처럼 무한한 감동이 있을까. 또한 거기에는 뭔가 소중한 것, 뭔가 고귀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감동한 고흐가 말하려는 정신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소. 그래서 1970 년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가수로서 37 위 ( 100 중 )에 있었던 전설적인 미국 가수이면서 작곡가, 작사였던 돈 맥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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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나는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애써서 말하고자 했던 것을 그리고
당신의 온전한 정신을 갈구하며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사람들은 듣지 않으려고 했고 알지도 못했어요.
아마도 , 지금은 사람들은 들으려 할 거에요."
그리고 마지막 그는 다시 반복하여
" 이제야 나는 알겠어요.
당신이~
~
~
~
아마도 사람들은 영원히 듣지 않을 거에요 " 라며 돈 맥클린은 이렇게 노래 부르고 있소.
사람들의 눈과 귀에는 고흐의 그림이 그저 외국어 같기만 하였소. 그렇게 거부와 고독과 우울의 세월이 흐르면서 빈쎈트는 정신도 신앙 생활도 쇠퇴해 갔소. 화가 인생 10 년 동안 그가 썼던 편지들에서 그의 영혼의 침식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었소. 편지 횟수가 서서히 줄면서 고뇌와 절망은 점점 더해 갔소. 결국 1889 년 5 월 8 일 병든 화가는 프랑스 생-레미 정신병원에 보내졌소.
가구도 별로 없고 좁은 방에서 그는 살게 되오. 고증에 의한 설로는 처음 병원에 와 안내하는 수녀가 " 창문을 열어 드릴까요?" 묻자 고흐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녀가 창문을 열자 거기 창밖으로 햇빛 쏟아지는 시골의 들녘이 펼쳐 지었소. 그것이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어 그의 좁은 방이 화실로 바꾸어졌소. 화실의 창 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였고 그 정원에는 꽃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소. 정신병원에서 그린 첫 작품의 소재가 그 꽃밭이었소. 그는 그림 한 점을 그렸고 오른쪽 하단에 '빈쎈트' 라고 이름을
써넣은 다음 짤막하게 <아이리스>라는 제목을 달았소. 바로 이 그림이 캘리포니아 주 말리부의 J. 폴 게티 박물관이 소더비 경매에서 수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온 작품이었소. 늘 그 그림 앞에는 접근 금지용의 밧줄이 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경비원이 상주한다고 하오. 그 그림이 탄생하고 100 년 후 캔 가이어는 위 박물관에서 이 꽃 그림을 보면서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소. 돈 맥클린의 노래 가사처럼.
정신병원에서 빈쎈트는 정신을 되찾아 그림을 당분간 그렸소. 그해 후반에 그는 <별이 빛나는 밤에> 이라는 그림을 완성했소. 돈 맥클린의 노래에 암시되어 있는 바로 그 그림이오. 그 속에는 빈쎈트의 영혼의 어두운 밤과 소망의 별빛이 공존하고 있었소.
그 그림에 대해 빈쎈트는 이렇게 말했소.
"그것은 또다시 영원한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까? 아니면 , 우리는 죽기 전까지 과연 삶의 반쪽밖에 모르는 것일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저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지도에 도시와 마을로 표시된 검은 점을 보며 꿈꾸는 것과 똑같이.."
아무도 그의 그림에서 그의 내면에서 울어나오는 영혼의 빛을 볼 수 없었소. 오직 동생 테오만이 볼 수 있었소. 생전에 팔린 작품이 오직 1 개뿐
임을 알듯이 세상 사람은 그의 그림에서 어둠 밖에 보지 못했소. 그가 얼마나 비탄에 잠겼을까! 모두들 멀치감치 비켜서서 발길을 돌렸으니 그는 점점 다시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 감정이 쇠락하여 갔소. 마지막 열정이 1890 년 7 월에 그린 < 까마귀 나는 옥수수 밭>이었소.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썼소.
"어지러운 하늘 밑의 광활한 옥수수밭"이라고 그림의 묘사와 함께 " 그리고 나는 그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해 1890 년 7 월 29 일 그 어지로운 하늘 밑에서 빈쎄트는 제 몸에 총을 쏘았소.
동생의 팔에 안겨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소.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형제는 빈쎈트의 비문에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찾는 고귀한 심성을 지녔다. " 고 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 재미있는 사연이 많은 빈쎈트의 편지들을 보면 , 빈쎈트는 그 모든 기벽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듯한 관심을 보이며 사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것만은 분명 하나님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 남겼소.
그리고 드디어 캔 가이어는 고백하였소.
"내가 고흐의 삶을 그냥 지나쳤고 그의 작품을 그토록 무심하게 외면했다는 것이 나를 슬프고 부끄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확신처럼 하나님만은 그의 삶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작품도 무심하게 외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캔은 그림과 편지 , 영화와 노래를 통하여 비로서 화가와 화가의 영혼을 보기 시작하였소. 그러나 그것 말고 우리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일면, 즉 화가를 통하여 영혼의 위대한 예술가인 예수의 일면을 보았던 것이오.
반 고흐는 그의 편지에서 말했소.
"그리스도는 예술가들보다 더 예술가이시다. 그분은 살아있는 영혼과 살아있는 육체로 작업하신다. 그리하여 동상이 아닌 인간을 만드신다. "
캔 가이어는 말했네.
"빈센트처럼 예수도 밭에서 씨 뿌리는 자 , 공중의 새 , 들판의 꽃,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하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 돈 맥클린의 표현을 빌려, <내 영혼의 어두움을 아는> 눈과 <고생에 시달린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화가 같은 손을 지니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누더기 옷을 걸친 누더기 인생들>을 사진에 담으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 하셨다. 빈쎄트가 스스로 입힌 상처로 목숨을 끊은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입힌 상처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자기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 집에 가오니 근심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네.
비슷한 점이 많지만 두 예술가의 생은 다르다고 했네.
그러나 빈쎈트의 정신병동에서의 죽음에 이른 시점에서는 예수님과 흡사함을 캔 가이어는 간파하였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 - 슬픔을 당하였거늘."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돈 맥클린의 노래 마지막 부분에 빈쎈트의 슬픔과 예수님의 슬픔의 한 단면이 한데 섞여 있다고 그는 말하네.
지금에야 나는 알 것 같다네.
당신이 내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
당신이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 얼마나 고뇌했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네.
지금도 듣고 있지 않거니와
영워히 듣지 않을지도 모르다네.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들은 그림에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리네.
예수님과 함께 빈쎈트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었일까 ?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영혼의 창> 주제를 결론 맺으며 끝나네.
" <그림을 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그림들은 창이 될 것이다. 우리 내면의 탕자인 부분을 감옥 밖으로 끌어내 집으로 가는 길을 찾게 해주는 창이 될 것이다. "
캔 가이어는 34 개의 소재를 가지고 펼쳐 가면서 끝에는 <영혼의 창>을 열어 주네. 그래서 그는 미국인들에게 지적 정서적 감화를 주는 "영혼의 작가" 이면서 베스트쎌러 작가군에 속하네. 미국 출판협의회에서 수여하는 '골드메달리언상' 2 번 ', C.S 루이스 명예도서상'을 받았네.
그의 책 서언을 여기에 쓰면서 마치네.
<여기 좀 보렴. 이 창을 들여다 보렴. 네 영혼을 보여주는 창이란다. 이 창은 너에게 네가 누구이며 네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 삶의 소리에 귀 기울릴 때 평생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네 삶이 너를 어디로 부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단다...>
가구도 별로 없고 좁은 방에서 그는 살게 되오. 고증에 의한 설로는 처음 병원에 와 안내하는 수녀가 " 창문을 열어 드릴까요?" 묻자 고흐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녀가 창문을 열자 거기 창밖으로 햇빛 쏟아지는 시골의 들녘이 펼쳐 지었소. 그것이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어 그의 좁은 방이 화실로 바꾸어졌소. 화실의 창 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였고 그 정원에는 꽃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소. 정신병원에서 그린 첫 작품의 소재가 그 꽃밭이었소. 그는 그림 한 점을 그렸고 오른쪽 하단에 '빈쎈트' 라고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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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서 빈쎈트는 정신을 되찾아 그림을 당분간 그렸소. 그해 후반에 그는 <별이 빛나는 밤에> 이라는 그림을 완성했소. 돈 맥클린의 노래에 암시되어 있는 바로 그 그림이오. 그 속에는 빈쎈트의 영혼의 어두운 밤과 소망의 별빛이 공존하고 있었소.
그 그림에 대해 빈쎈트는 이렇게 말했소.
"그것은 또다시 영원한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까? 아니면 , 우리는 죽기 전까지 과연 삶의 반쪽밖에 모르는 것일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저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지도에 도시와 마을로 표시된 검은 점을 보며 꿈꾸는 것과 똑같이.."
아무도 그의 그림에서 그의 내면에서 울어나오는 영혼의 빛을 볼 수 없었소. 오직 동생 테오만이 볼 수 있었소. 생전에 팔린 작품이 오직 1 개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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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하늘 밑의 광활한 옥수수밭"이라고 그림의 묘사와 함께 " 그리고 나는 그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해 1890 년 7 월 29 일 그 어지로운 하늘 밑에서 빈쎄트는 제 몸에 총을 쏘았소.
동생의 팔에 안겨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소.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형제는 빈쎈트의 비문에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찾는 고귀한 심성을 지녔다. " 고 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 재미있는 사연이 많은 빈쎈트의 편지들을 보면 , 빈쎈트는 그 모든 기벽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듯한 관심을 보이며 사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것만은 분명 하나님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 남겼소.
그리고 드디어 캔 가이어는 고백하였소.
"내가 고흐의 삶을 그냥 지나쳤고 그의 작품을 그토록 무심하게 외면했다는 것이 나를 슬프고 부끄럽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확신처럼 하나님만은 그의 삶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작품도 무심하게 외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캔은 그림과 편지 , 영화와 노래를 통하여 비로서 화가와 화가의 영혼을 보기 시작하였소. 그러나 그것 말고 우리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일면, 즉 화가를 통하여 영혼의 위대한 예술가인 예수의 일면을 보았던 것이오.
반 고흐는 그의 편지에서 말했소.
"그리스도는 예술가들보다 더 예술가이시다. 그분은 살아있는 영혼과 살아있는 육체로 작업하신다. 그리하여 동상이 아닌 인간을 만드신다. "
캔 가이어는 말했네.
"빈센트처럼 예수도 밭에서 씨 뿌리는 자 , 공중의 새 , 들판의 꽃,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하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 돈 맥클린의 표현을 빌려, <내 영혼의 어두움을 아는> 눈과 <고생에 시달린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화가 같은 손을 지니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누더기 옷을 걸친 누더기 인생들>을 사진에 담으셨다. 빈쎈트처럼 그분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 하셨다. 빈쎄트가 스스로 입힌 상처로 목숨을 끊은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입힌 상처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자기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 집에 가오니 근심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다네.
비슷한 점이 많지만 두 예술가의 생은 다르다고 했네.
그러나 빈쎈트의 정신병동에서의 죽음에 이른 시점에서는 예수님과 흡사함을 캔 가이어는 간파하였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 - 슬픔을 당하였거늘."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돈 맥클린의 노래 마지막 부분에 빈쎈트의 슬픔과 예수님의 슬픔의 한 단면이 한데 섞여 있다고 그는 말하네.
지금에야 나는 알 것 같다네.
당신이 내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
당신이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 얼마나 고뇌했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네.
지금도 듣고 있지 않거니와
영워히 듣지 않을지도 모르다네.
오늘날에도 많은 관람객들은 그림에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리네.
예수님과 함께 빈쎈트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었일까 ?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영혼의 창> 주제를 결론 맺으며 끝나네.
" <그림을 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그림들은 창이 될 것이다. 우리 내면의 탕자인 부분을 감옥 밖으로 끌어내 집으로 가는 길을 찾게 해주는 창이 될 것이다. "
캔 가이어는 34 개의 소재를 가지고 펼쳐 가면서 끝에는 <영혼의 창>을 열어 주네. 그래서 그는 미국인들에게 지적 정서적 감화를 주는 "영혼의 작가" 이면서 베스트쎌러 작가군에 속하네. 미국 출판협의회에서 수여하는 '골드메달리언상' 2 번 ', C.S 루이스 명예도서상'을 받았네.
그의 책 서언을 여기에 쓰면서 마치네.
<여기 좀 보렴. 이 창을 들여다 보렴. 네 영혼을 보여주는 창이란다. 이 창은 너에게 네가 누구이며 네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 삶의 소리에 귀 기울릴 때 평생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네 삶이 너를 어디로 부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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