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4일 월요일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이덕주, 홍성사, 2006


본문중에서)
한국 교회사를 공부하는 내게 에베소 교회에 주신 경고의 말씀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교회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모(母)교회> 칭호를 받던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은 칭찬으로 시작해서 경고로 끝난다. 복음을 위한 수고와 인내가 남달랐고 이단을 척결하여 정통 신앙을 지켜냈으며, 주를 향한 열심 등에서 칭찬거리가 많았던 교회였지만 <처음 사랑(First Love)>을 상실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베소 교회는 <책망받는> 교회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밧모섬 계시가 내렸을 당시 에베소 교회 상황과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세기가 조금 넘은 역사에서 한국 교회가 이룩한 선교 업적과 결과는 가히 <20세기 선교의 기적>으로 불릴 만하다. 전체 인구의 20~25% 정도가 기독교인이라는 통계 수치가 아니더라도 나라 구석구석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들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한국 교회는 복음 전도와 정통 신앙 수호에 대한 열정을 발휘하였고 고난의 역사 속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교회의 그런 <자랑거리>가 <과거지사(過去之事)> 라는 점이다.
교회 안에 깊숙히 파고 들어온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물량적 업적주위가 빚어낸 각종 부조리, 특히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층의 윤리적 문제들로 한국 교회는 사회에서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안밖에서 “한국 교회 이대로는 안된다”, “한국 교회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경고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에베소 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과거의 자랑스러운 역사 속에 담겨 있던 <처음 사랑>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 사랑의 순수한 열정, 조건 없는 희생이 사라진 교회의 사업과 행사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속이 없고, 소리는 요란하지만 반향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 이다.
길은 없는가? 있다. 에베소 교회에 주셨던 기회가 아직은 남아 있다. “어디서 떨어 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 2:5~7)” 그래야 촛대가 그 자리에 남아있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교회에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회개>, <처음 사랑 회복> 이다. 이 둘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다. 참다운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눅 3:8) 수반하는데 그것이 곧 사랑의 실천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영적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할 일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반복하는 길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한국 교회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가 일어났던 선교 초기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민족사에서 한말(韓末)이라 부르는 1880 년대부터 1910년까지 30년 동안, 한국 교회 <1 세대(First Generation)> 신앙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한국의 초대교회사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 희생의 역사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열정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 교회는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 발전한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이라면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자 소중한 신앙 유산이다.
그래서 나는 초대 교인들의 신앙 행위를 <다시 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한국 교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자료를 찾고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이글을 썼다. 이 책을 쓰면서 궁긍적으로 기대한 것은 조상들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과거의 하나님을 오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일이다. 특히 한국 초대교회사를 아름답게 장식했던 신앙 선배들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 그 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오늘의 나와 한국 교회가 처한 신앙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자랑스러운 과거 역사가 오늘 현실에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읽었다.

우리가 몰랐던 '날 십일조(물질의 십일조처럼 주님께서 주신 시간도 10분의 일은 주님을 사역을 위해 헌신)' 운동을 당연하게 여겼던 신앙 선조들의 순수한 믿음을 볼 때 편함만을 추구하는 저의 모습이 예수님께 꾸중듣던 바리세인의 모습이 아닐지 두렸습니다.



오경준 작가의 <마태가의 비밀>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들을 통해서 서학으로 전해진 천주교가 어떻게 선교사 없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변화되었는지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뜨거웠던 믿음의 열정을 소설 형식으로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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